지난 16일. 밤 한 언론사 사무실에서 1인 시위를 하다가 "업무
방해"와 "퇴거불응"으로 신고를 받고 입건됐다. 야간이라는
이유만으로 "폭력행위" 어쩌구 저쩌구하는 무시무시한 죄목까지
추가 받아 조사를 받았는데, 내가 한 행동이 워낙 확실한 터라,
그렇게 저렇게 조사는 마무리되어갔다. 그런데, 문제는 조서에
날인하기.
마침 가지고 있던 도장이 없었다. 골수 지문날인거부자인 나.
조서에 지문을 간인하는 것 역시 내키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싸인으로 때워보겠다고 우겨봤다. 혹시나 했더니만 역시나다. 어림
반푼 어치도 없다는 식의 대답이 돌아온다.
어림 반푼 어치가 없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저 형사님.. 제가요,
지문 날인을 거부한 터라 주민등록증도 없거든요? 제발 좀
존중해주시죠?" 형사님 양보는커녕, 한술 더 뜬다. "그럼 너
옐로우카드에도 지문 안찍을거야?" 옐로우카드라? 범죄자가 입건될
때, 열손가락 지문을 찍어 보관하는 카드다. 당연하다. 그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조사관과의 일장 토론이 시작되었다. 지문, 혈액형, 유전자정보 등
개인의 생체 정보를 국가기관이 수집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는
얘기,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해서는 안된다는 얘기 등등... 온갖
수사가 동원되어 한사코 지문 날인 만은 막아보려는 필사적인
싸움이 계속됐다.
조사관의 논리도 만만치 않았다. 증거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꼭 지문을 찍어야 한다느니, 법이 그렇다느니.
그러나 만만치 않은 건 나도 마찬가지다. 급기야 찍으나 찍지
않으나, 증거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참고자료로만 쓰이는
경찰조서의 처량한 신세까지 언급되었다. 기소 한번 당하지
않으면서 화려하게 들락달락거린 나의 경찰서 출입 이력도 논거에
한 몫했다. "다른 데서는 안 찍겠다고 하면 그냥 강요하다가
말던데요?"
물론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법에 의해 지문을 찍을 의무가
누구에게나 지워진다. 그러나 그 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처벌할 수 있는 법 규정은 어디에도 없다. 난 그걸 이용해서 다른
경찰서에서 써먹었던 방법을 여기서도 써먹을 요량이었다.
신고인 신분으로 경찰서에 머물던 언론사 관계자들은 새벽
다섯시쯤 집에 돌아갔다. 그에 반해, 난 아침 9시가 지나도 보내줄
낌새가 안 보인다. 옐로우 카드에 지문날인을 거부한 탓이란다.
조서에 간인 받는 것은 조사관도 이제 포기했다. 그러나, 옐로우
카드에는 영장을 받아서라도 반드시 지문을 받으시겠단다.
"영장이요?" 압수수색영장이란다. 맙소사. 급기야 압수수색영장에
의해 손가락 마저 압수되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다급했다. 오오
하느님! 언론사와 싸우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이제는 국가의
생체정보수집 반대를 위해서까지 싸워야 하는 겝니까?
전화로 국가인권위원회와 참여연대 인권센터 - 조사를 받은
경찰서와 참여연대가 매우 가깝다 - 에 도움을 청했다. 제기랄!
얼마 전 헌법재판소가 지문날인에 대해서 합헌 결정을 내렸다나?
강제로 찍게 한다면 모르지만 영장에 의해 집행될 경우는 자기들도
어쩔 수 없단다. 어떠한 연대와 도움의 손길도 기대할 수 없었다.
난 홀로 싸울 수 밖에 없는 지경에 놓였다.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졌다. "지금이라도 지문만 찍는다면, 당장 집으로
보내주겠다."는 회유가 계속된다.
급기야 회유는 철퇴로 돌아왔다. 난 체포 12시간 30분만인 17일
정오 급기야 유치장에 입감되었다. 압수수색영장이 나오면 바로 열
손가락 지문을 강제로 채취 당한 후 석방하기로 하고.
상상만해도 끔찍한 그 악명 높은 입감 신체검사. 똥구멍에 무기를
숨겨들어오는 엄청난 분들을 막아보겠다고, 모든 입감자를
대상으로 행해지는 전형적인 인권유린이다. 완강히 거부 의사를
밝히니, 다행히 주머니 수색 정도로 끝난다.
유치장에 들어서서 고무신을 신고 철창 안에 들어가 있자니,
조사실과는 감회가 다르다. 아! 생각을 바꿔 지문만 찍으면 바로
석방될 수 있는 신세. 난 졸지에 양심수가 됐다. 그것도 친일형사
노덕술이 독립투사들을 고문하던 바로 그 경찰서에서. 그것도
광복절 다음다음날에.
같은 방에는 나를 제외하고 세 명이 있다. 술김에 흉기를 사용해
싸우다가 살인미수범이 된 어떤 분. 무려 다섯 사람으로부터 사기
고소를 당해 이 경찰서, 저 경찰서 옮겨다니며 조사 받는 중이신
어떤 분. 그리고 아리랑치기 한 분.
평소 같으면 얘기만 들어도 끔찍할텐데, 차분히 자기 얘기들을
하는 모습에, 감동까지 밀려온다. 유치장 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궁금한 것도 많은 나에게 설명도 조곤조곤 잘해주신다. 하긴 내가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이런 분들을 만날 기회가 있으랴. 그
분들에게는 유치장 구경을 처음해 보는 내가 오히려 더 신선한
존재다. 가뜩이나 늦게 돌아가는 유치장 안 시계는 이 분들 덕에
그나마 제 템포를 찾는다.
살인미수범 아저씨. 열 다섯 살 난 따님과 노모가 계시단다. 단돈
500만원이 없어서 합의를 못 보신다고 했다. 그 돈 있으면, 당신
딸 대학갈 때까지 학비인데, 그 돈으로 합의 보느니, 차라리
큰집에서 몇 년 더 계시겠단다.
이 아저씨는 입감 즉시 담당수사관이 자신의 피의사실을 가족에게
통보한 것을 두고 분통을 터뜨렸다. 당신 아들이 살인미수피의자로
체포되어서 형을 살게되었다고 통보 받은 병든 노모의 참담한
마음. 그는 그것을 더욱 참담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 살인미수범은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있었다. 형을 사는
동안 예수님을 열심히 믿어 새 사람이 되겠다는 각오가
대단하셨다. 형을 깎기 위해 검사나 판사 앞에서 이런 식의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잠시 스쳐가는
유치장 동료에게 누가 그런 말을 거짓말로 하겠는가. 그는
진심으로 깊이 뉘우치고 있었다.
'예수님보다는 똘레랑스를 믿어보시면 어떨까요?'하고 말을
꺼내보려다, 그냥 말았다. 그의 각오가 지니는 의미심장함을
읽었기 때문이다. 하긴 착하게 살겠다는데, 예수면 어떻고,
똘레랑스면 어떨까? 물론 둘 다 믿으면, 더할 나위 없는 환상의
궁합이겠지만.
그 살인미수범은 곧 나갈 수 있는 나를 부러워하면서도, 나를
걱정해줬다. 다시는 이런 곳에 오지 말란다. 한번 발을 들이기
시작하면, 자꾸 들이게 된다고. 하긴 나도 지금은 그게 걱정이다.
사기 혐의로 들어오신 분. 경제범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경제적으로
비교적 여유로운 분이다. 면회를 한번 다녀오시더니 한 아름
과자봉지를 들고 오신다. 덕분에 우리 방에서는 조그만한 과자
파티가 열렸다. 빠따 코코낫 비스켓과 샤부르 크래커가 그렇게
맛있는 것인지는 거기서 처음 깨달았다. 식사도 다른 사람들의
것은 관식인데 반해 이분의 것은 사식이다. 남의 젓가락이 부실한
관식의 반찬을 메우러 자신의 반찬으로 달려드는 것을 이 분은
꺼려하지 않는다. 덕분에 나도 반찬이라곤 김치뿐인 관식을
먹다가, 이 분이 먹는 탕수육 몇 조각을 얻어먹고, 유치장
안에서의 황홀경에 빠지기도 했다. 유치장 안에 들어가면 참
사소한 일이 황홀하다.
아리랑치기. 이 분은 생긴 것만 보면 황인종 예수님이다. 아마도
며칠 동안 면도하지 못한 수염 때문에 더 그렇게 보였는지
모르겠다. 막 자라기 시작한 수염이 온화한 눈빛과 어우러져 묘한
조화를 이룬다. 외모가 그런데, 말조차 없어서, 흡사 신비주의적인
분위기까지 엿보였다. 나머지 세 사람 재잘재잘 떠드는 중에도,
자신이 보는 책에만 열중하신다. 만약 과자 파티가 없었다면, 이
분과는 말 한 마디 못해보고 그냥 헤어졌으리라. 서울에 상경한지
얼마 안되어 도박으로 전재산 800만원을 모두 날려버리고, 배가
고파서 아리랑치기를 시도했다가 지지리도 재수없이 첫 범행때 그
자리에서 붙잡히신 어수룩하고 부끄러움이 많은 분이다.
가뜩이나 시간이 더딘 유치장. 그곳에 몇 시간 째 있어보면,
자연스레 초인종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초인종이 울리면,
유치장과 바깥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영장이
기각되었다든가, 누군가 면회를 왔다든가 하는 소식은 항상 초인종
소리로 시작한다.
나 역시 초인종 소리에 예민해질 수 밖에 없었다. 발부가 되든,
기각이 되든, 나는 내 열손가락 지문의 운명을 결정해줄
압수수색영장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으므로. 게다가 입감 직전에,
아주 친한 친구 한 명에게 면회 와서 사식을 넣으라고 연락을 해둔
터라 내가 가지는 초인종 소리에 대한 기대감은 각별했다.
저녁 식사 후, 오후 7시. 기대하던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간수가
입구에 다녀오더니, 말없이 우리 방 철문을 연다. 나보고
석방이란다. "영장 집행한답디까? 영장 기각되었답디까?"
모른단다. 석방이니, 그냥 나가란다.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가니,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 그 사람을 따라, 조사실로 돌아왔다.
나를 석방시킨 장본인은 영장을 기각한 판사님이 아니었다. 수사를
지휘하는 검사가 압수수색영장이 처리되기 전이라도 굳이
구속수사할 필요가 없다며, 즉시 석방하라고 하셨단다. 이름 모를
검사의 유연성과 똘레랑스가 참 감사하다. 인간의 마음은 간사하다
했던가? 검찰로부터의 경찰의 수사권 독립에 절대적으로 찬성하는
나지만, 이 때만큼은 아직 경찰 수사권이 검찰의 지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못내 고맙다.
이어지는 조사관의 말은 마음을 무겁게 한다. 압수수색영장이
발부되면, 집으로 찾아와, "수색" 끝에 기어이 손가락을
"압수"해서 지문을 가져가셔야겠단다. 쓴웃음이 나왔다. 만감이
교차한다. 영장만 나오면, 영장에 의해 손가락을 빼앗긴 채,
강제로 지문을 날인해야 하는가? 아니면 끝내 완강히 거부하다
"공무집행방해"로 다른 죄목을 늘리고, 손가락을 사수해야 하는가?
지문만 찍으면 언제든지 나갈 수 있었던 양심수 생활. 내가 경험한
시간은 단 7시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시간은 '감금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굴복시키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수도 있겠다'
는 점을 깨닫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영장이 기각되길 기도하는 수 밖에 없다. 누구 나의 손가락을
위해서 시위해줄 사람은 없수?
꼬다리 :
원칙에 매몰되어, 원칙이 추구하는 가치를 외면하는 것을 나는
전문용어로 "꼴통"이라고 한다. 때로는 융통성도 필요하다. 물론
융통성에는 전제가 있다. 그 융통성으로 인해 피해 받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야 한다. 원칙에만 매몰될 경우 원칙이 추구하는
가치가 훼손될 우려가 있다면, 그것으로 인해 피해 받는 사람이
없다는 전제 하에 우리는 당연히 융통성을 선택해야 한다.
내 사전에 의하면, 살인미수범 아저씨의 담당수사관은 "꼴통"이다.
입감 시에 피의자의 가족에게 반드시 통보해야 한다는 원칙에만
매몰되어, 피의자의 의사나 인권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꼴통".
인신구속시에 피의자 가족에게 반드시 통보해야 한다는 원칙은
가족도 모르게 침해받을지 모르는 피의자의 인권을 위한 것이다.
그러한 인권 침해의 우려가 없고, 피의자가 자신의 혐의사실을
모두 인정하는 상황에서, 피의자가 노모를 걱정하여 집에는 제발
통보하지 말아달라고 그렇게 부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살인미수범의 담당 조사관은 기계적으로 그 노모에게 "당신 아들이
살인미수 피의자로 수감되어 있다"고 서면 통보하셨단다.
뻔뻔스럽게도 "원칙"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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