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2/10(화)
미국 가려면 지문부터 잘 모셔라
미국 입국과 관련해 아픈 기억을 가진 한국인이 적지 않다. 신혼
여행지로 미국을 선택해 여행사에 계약금까지 주었는데 비자가
나오지 않는 바람에 황급히 여행지를 바꿔야 했던 부부. 미국에서
하기로 한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려다 역시 비자가 나오지 않아
결혼식을 보지 못한 어머니 등등….
앞으로 이러한 사람들이 더욱 늘어날지 모른다. 미국 가는 길이
더욱 까다로워졌기 때문이다.
미국은 의회가 대부분의 국사(國事)를 결정하는 ‘의회 우선’의
국가다. 8년 전인 1996년 미 의회는 외국인의 미국 방문을 더욱
엄격히 통제하기 위해 ‘출·입국(Exit-Entry)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나 필요한 예산을 배정하지 못해 행정부가 시행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2001년 9·11테러가 발생했다.
그러자 이듬해인 2002년 11월 미 행정부가 테러로부터 미국을
지키기 위해 ‘국토안보부(DHS)’를 만들고, 2003년 3월 미 의회는
기존의 출·입국 프로그램을 더욱 강화한 ‘US-VISIT(US Visitor
and Immigrant Status Indicator Technology·미국 방문자 및
이민자의 신분 인식 기술)’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리고 1월5일
국토안보부가 이 프로그램의 시행에 들어간 것이다.
US-VISIT는 비자를 갖고 미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만을 상대로 한다.
따라서 비자가 있어야만 미국을 갈 수 있는 나라(이하 비자국)의
국민이 주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비자국의 국민은 미국의
공항이나 항구에 도착하는 즉시 좌우 검지를 스캐너에 대 지문을
입력하고 디지털 카메라로 얼굴을 찍어야 한다. 지문은 그 사람만
갖고 있는 고유한 ‘생체(生體)정보’인데 미국은 이를 채취해
범법자의 입국을 막겠다는 것.
생체정보 채취 전 세계서 반발
미국은 유럽연합(EU) 회원국과 일본·호주·브루나이 등 27개
국가(이하 면제국) 국민에 대해서는 관광 목적일 경우 비자를
면제해주고 있다. 따라서 관광할 목적으로 입국하는 27개국 국민은
US-VISIT의 적용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유학이나 사업 등
관광 이외의 목적으로 입국하는 면제국 국민은 사전에 그 목적에
맞는 비자를 발급받아야 하므로, 지문을 찍고 얼굴 사진을 찍는
US-VISIT의 적용대상이 된다.
이러한 외국인은 미국을 떠날 때 ‘반드시’국제공항이나
국제항구에 설치돼 있는 출국자동심사기에 여권과 비자를 대 읽게
하고, 이어 좌우 검지를 대 지문을 입력해야 한다. 이때 입력한
생체정보가 입국시 입력한 생체정보와 다르면 국토안보부 등은
다른 사람이 여권을 도용해 출국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그 사람을
체포한다.
9·11테러를 일으킨 19명의 범인은 비자국인 이슬람계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이중 2명은 비자에서 허용한 체류기간을 넘겨
미국에 머물다가 테러에 가담했다. 짐 윌리엄즈 미 국토안보부
부국장은 기자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이를 거론하며 US-VISIT는
테러를 줄이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지문 등 생체정보를 채취하는 것은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범죄자나 범죄용의자를 상대로 이뤄지는 것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비자국 국민들은 미국의 조처에 거부감을 느끼기 쉬운데 가장 세게
반발한 나라는 브라질이었다. 브라질은 미국이 US-VISIT를 시행한
바로 그날부터 브라질을 방문하는 미국인에 한해 지문을 채취하고
얼굴 사진을 찍는 조치를 강행했다.
이에 대해 브라질 법원이 중지를 명령했으나, 브라질 외무부는
최소 30일 동안은 이를 계속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브라질의 조치에 대해 모욕감을 느끼긴 미국인도 마찬가지.
1월13일 미국 아메리칸 항공사(AA)의 로빈 허시 조종사는 모욕감을
느껴 사진 촬영을 거부하고 가운뎃손가락을 올렸다가 체포돼
3만6000헤알(약 1만2750달러)을 내고 풀려났다.
이라크에 2500여명의 전투병을 보내놓고 있는 폴란드도 강하게
반발했다. 1월13일 레흐 카친스키 바르샤바 시장은 “지문 채취에
항의해 4월로 예정된 미국 방문을 취소한다”고 발표했고, 1월26일
미국을 방문한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프스키 폴란드 대통령은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이라크 파병 대가로 미국 비자를
면제해달라”고 요구했다.
한국은 브라질과 달리 이라크에 파병을 한 나라다. 폴란드는 미국
비자를 신청한 국민 중 약 40%가 거절되지만 한국은 5%밖에
거절되지 않는다. 한국은 브라질이나 폴란드에 비해서는 훨씬 더
좋은 조건을 갖고 있음에도 도매금으로 US-VISIT의 대상 국가가 된
데 대해 매우 못마땅해한다.
하지만 미국은 한발 더 나아갔다. 8월부터 비자를 신청하는
외국인은 비자를 신청할 때도 좌우 검지의 지문을 찍어야 한다고
발표한 것. 이는 1월5일 시행된 조치와 한 묶음의 것이나, 21일의
시차를 두고 발표함으로써 다시 한번 미국은 비자국 국민들의
원성을 샀다.
그러나 몸살을 앓기는 27개 면제국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27개국에
대해 “올해 10월26일 이후 새로 발행하는 여권에는 반드시 여권
소유자의 생체정보(지문)를 넣어달라”고 요구한 것. 아울러
미국은 새로 발행하는 미국 여권에도 여권 소지자의 생체정보를
넣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니까 미국은 미국과 27개 면제국은
여권에, 나머지 국가는 미국 비자에 지문을 넣겠다고 한 것이다.
미국은 27개 면제국에 대해서는 “관광 목적시 무비자 입국이라는
기존의 혜택을 유지해줄 테니 미국과 함께 새로운 여권을
만들라”고 주문한 것이고, 나머지 국가에 대해서는 “당신네는
믿을 수 없으니 미국이 비자에 지문을 넣어주겠다”고 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미국과 27개국이 여권을 교체하면 ‘준 선진국’을
자부하는 한국도 생체정보가 들어간 여권을 발행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27개 면제국 중에서는 10월26일까지 지문 정보가
입력된 여권을 발행할 수 없는 나라가 있다는 점이다. 윌리엄즈
부국장은 “면제국이 새 여권 발행 시한을 지키지 않으면 미국은
그에 따른 대안을 모색할 것”이라며 최악의 경우 비자 면제국
지위를 박탈할 수 있음을 암시했다.
테러 예방 외치지만 허점 여전
생체정보가 들어간 여권과 비자를 발급하는 데 드는 비용은
고스란히 여권이나 비자 신청자에게 떠넘겨질 것이다. 결국
9·11테러는 미국을 방문하고자 하는 전 세계 사람들로 하여금
여권이나 비자에 지문을 찍게 하고 그 비용을 부담케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다면 여기서 떠오르는 의문은 ‘생체정보를 넣은
여권과 비자가 발급되면 세계는 테러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인가’라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US-VISIT에도 몇 가지 허점이 있다. 미국은 미국인과
27개 면제국 국민에 대해서는 미국 출입국시 여권을 리더기로
읽기만 할 뿐 이들의 지문을 채취하지 않는다. 따라서 테러범이
이러한 나라 국민 중에서 모습이 비슷한 사람의 여권을 입수해
입·출국할 경우 이를 막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왜 미국은,
미국인과 27개 면제국 국민에 대해서는 지문을 찍게 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주한 미대사관측은 적절한 설명을
내놓지 못했다.
미국에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지문을 찍고 입국한 외국인의
여권을 입수해 출국을 시도한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범인이
외국인의 검지손가락을 잘라 출국자동심사기에 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에 대한 답변은 한국에서 찾아보는 게 오히려 빠르다. 수지 김
사건의 주범 윤태식씨는 ‘패스 21’이라는 지문인식 시스템
개발회사를 운영했는데, 이 회사는 죽은 사람의 지문을 대면
반응하지 않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컴퓨터로 하여금, 살아 있는 사람의 손가락에서는 끊임없이 땀샘이
움직이나 죽은 사람은 땀샘이 움직이지 않는 차이를 구별해내도록
함으로써 죽은 사람의 지문을 이용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한
것. 이렇게 예민한 시스템이다 보니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즉
지문에 허물이 벗겨졌거나, 칼에 벤 상처가 있거나, 또 지문에
페인트나 잉크 등이 묻어 있으면 다른 사람의 지문으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US-VISIT도 이러한 문제점을 안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미국에 가고자 하는 한국인들은 좌우 검지를 비자 신청할 때와
똑같은 상태가 되도록 ‘신주단지 모시듯’ 모셔야 한다. 미국에
가려면 손가락과 지문을 잘 관리해야 한다. 아! 9.11테러가 낳은
지문전쟁이여~.
(주간동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