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2/05(목)

<이안젤라의 시네마 토크>`페이첵`은 고전적 SF상상력 전복 

 
예사롭지 않은 꿈을 꾸게 되면 흔히들 복권을 산다. 그 꿈이 숫
자와 관련된 것이라면 아마도 로또 판매대를 그냥 지나칠 수 없 을
것이다. 과학적으로 꿈은 뇌에 새겨진 경험과 기억에 대한 정
보들이 무의식 속에서 떠오른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꿈 이
미래를 예지하는 정보이기를 원한다.

영화는 진작부터 SF라는 장르 속에서 문명이라는 편도 열차에 올
라탄 인류의 미래가 어떠한 모습일 것인가에 대해 다루어왔다.

지금까지 역사 속에서 드러난 희망 또는 불안의 징후들을 미래의
모습을 빌려 펼쳐보이는 SF 장르는 테크놀로지와 상상력이 빚어
내는 악몽이 되곤 한다.

그 양상이 어떤 것이든간에 영화가 그려내는 미래는 우리가 상상
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다. 미셸 푸코의 표현을 빌리자면 ‘동
일자의 역사가 이어지는 연장선상에 있는 동일자의 미래’일 것
이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날로 촘촘히 짜여가는 정보화의
그물로부터 미래에 대한 전망도 자유롭지 않다. 이런 사회에서
내가 누구인지 확인 가능하도록 하는 것은 기억과 정보다.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한 SF 작가 필립 K 딕은 개인의 정체성과 실존 의
문제를 기억과 정보라는 키워드를 통해 제시한다. ‘블레이드
런너’, ‘마이너리티 리포트’, ‘페이첵’ 등 영화화된 필립 K
딕의 작품들은 이런 키워드들로 가상현실로서의 미래를 꿈꾼??

가장 먼저 영화화된 ‘블레이드 런너’는 아주 낯익은 대도시 뒷
골목의 풍경 속에 기존의 서사물들에서 무수히 되풀이되던 인조
인간 이야기를 끌어들여 칙칙한 미래를 예언한다. 기억을 지배하
는 권력에 의해 자기정체성을 확신할 수 없는 미래사회를 만들어
냄으로써 우리를 실존적 회의에 빠뜨린다. 자본의 지배 속에서
날로 물신화되고 관료화되어 가는 세계,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되
는 폭력, 정보화의 그물 속에 소멸되어 가는 개인의 정체성 등
우리 시대가 품고 있는 위기의 징후들이 암울하게 그려진다.

‘블레이드 런너’가 과거에 대한 기억과 정맬?遮?틀로 실존 의
위기를 제시한다면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권력이 미래를
정보화했을 때 봉착하게 되는 위기에 주목한다. 여기서 정보는 곧
권력이다. 과거나 현재뿐 아니라 미래까지도 정보화하는 가공 할
파시즘의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테크놀로지가 아니라 인 간의
문제, 철학의 문제다.

앞의 영화들보다 훨씬 덜 암울해진 대신 훌쩍 현재와 가까워진
‘페이첵’의 미래 사회에서도 역시 문제는 기억과 정보다. 그런
데 여기서는 더 이상 기억이 실존의 위기를 초래하지 않는다. 실
존의 지배는 여전히 정보를 장악하는 능력에 달려있으되 이런 능
력은 ‘돈’에 의해 좌우된다. 여기서는 능력이 곧 테크놀로지다 .
개인은 실존에 대한 고민 때문이 아니라 돈을 획득하기 위해
기억을 담보로 미래를 조작한다. 그러기 위해서 정보가 필요하다 .
조작가능한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아무런 회의 없이 테
크놀로지를 즐긴다. 기억과 정보를 정체성의 바탕으로 보지 않고
‘돈’을 중심에 두게 되면 실존은 가벼운 껍데기에 불과해진다 .
주인공이 자본과 권력에 맞서 자신의 기억과 미래를 걸고 죽자
사자 싸우는 것은 존재확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평생을 보장할 대
박을 위해서다. 전자 주민등록증 제도 도입 문제보다 로또 당첨 이
더 솔깃한 시대에 ‘페이첵’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다. 이제
테크놀로지와 정보화의 문제는 더 이상 징후가 아니라 증상이 되
어 버린 것 같다. 

영화인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