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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역사이야기] 만주국의 그림자 -한겨레21
  글쓴이 NFM 글쓴날 2002-02-13 22:19:37 조회 3099
  링크 http://hani.co.kr/section-021075000/2001/021075000200103270352039.html






[역사이야기] 만주국의 그림자




병영국가로서의 그 분위기는 박정희 치하 이남사회에서 어떻게 재현되었나





사진/1931년 만주를 침략하여 길림성에 진주한 관동군.(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만주는 우리에게 어떤 곳이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만주하면 흔히 고구려의 웅대한 기상이 펼쳐졌던 우리의 옛땅으로 생각한다. 만일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하였다면 만주가 아직 우리 땅일 텐데 하는 아쉬움 넘치는 공상은 남에서도 북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역사에서 가정은 있을 수 없다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고대사에 관한 이런 공상은 정작 만주라는 지역이 우리 근현대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1930년대와 40년대 초반에 존재했던 만주국이 우리 사회에 아직도 어떤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가에 대한 현실적인 관심을 가로막는다.


만주는 단지 고대사에서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19세기 말 이래 숱한 이민들이 둥지를 튼 땅으로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로서 만주는 우리의 근현대사에 깊이 개입했다. 만주에서 벌어진 일들을 빼놓고서 우리의 근현대사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만주 점령, 관동군 참모들의 계산






사진/괴뢰 만주국의 영향은 만주군관학교 출신인 박정희.(박정희·김일성)



만주는 비단 우리의 근현대사에 영향을 끼친 중요사건들이 집중적으로 일어난 곳만도 아니었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문가 오웬 라티모어(Owen Lattimore)는 1932년에 간행한 만주에 관한 저서의 부제를 ‘갈등의 요람’(Cradle of Conflict)이라고 부쳤다. 라티모어에게 만주는 낡았지만 아직 생명력을 잃지 않은 중국문명, 좀더 새롭고 물질적으로 막강한 서양- 제국주의화된 일본을 포함- 문명, 그리고 동양을 향해 열정적으로 다가오는 러시아의 공산주의 문명이 충돌하는 곳이었다.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에 일본인들은 만주를 일본제국의 생명선(生命線)이라 불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만주를 일본제국의 사활을 결정하는 특수지역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1차대전에서 독일의 패망은 독일을 모델로 생각해온 일본군의 젊은 장교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이들은 총력전으로 수행되는 현대전에서는 자급자족적인 제국을 건설함으로써, 군사력뿐 아니라 총체적인 전쟁수행능력을 제고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그들에게 만주는 일본제국주의의 사활을 결정짓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만주가 일제에게 생명선이었다면, 1930년대의 만주는 동아시아의 피압박민중에게 일본제국주의와 첨예하게 대치하는 새로운 전선이었다. 새로운 대치선 만주는 동아시아 변혁의 핵으로 떠올랐을 뿐 아니라 분단된 남과 북의 정치체제의 싹이 발아한 곳이기도 하다.


1931년 9월18일 일제는 군사행동을 개시하여 만주를 불법강점했다. 이 침략행위는 요즈음 들어서 ‘만주사변’이라는 일제의 용어 대신 ‘만주전쟁’으로 불리며, 2차대전의 도화선으로 재조명받고 있다. 그런데 일제의 만주강점은 조선인들에게 싫든 좋든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다가왔다. 관동군이 만주에서 군사행동을 강행한 것은 정치인, 관료, 군부, 재벌, 귀족 등 일본제국주의 내의 주요 엘리트 그룹의 합의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 등 관동군 참모들은 군부가 만주를 점령하면 일본 정부도 이를 기정사실화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치밀한 계산하에 과감한 행동을 단행했다. 일본 군부에서 불세출의 천재적 전략가라는 이시와라는 만주를 점령해야만 조선통치가 비로소 안정될 수 있다고 보았다. 비단 이시와라만이 아니었다. 같은 관동군 참모로 뒤에 육군대신을 지낸 이타가키(板垣征四郞)도 “만몽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참된 조선통치는 기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조선군(조선주둔 일본군) 참모들은 더 적극적이었다. 가미다(神田正種)는 원산총파업과 광주학생운동, 그리고 각종 파업과 폭동으로 극도로 불안해진 조선정세의 안정을 위해서는 일본군의 실력을 과시해야 한다고 뼈저리게 느꼈다고 회고했다. 같은 조선군 참모인 도요시마(豊島豊太郞)는 만주에서의 반일운동이 고조되면서 이 영향이 조선 내의 반일운동을 고무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통치의 안정을 기하고 민중을 길들이기 위해 과감한 군사행동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불행히도 관동군과 조선군 참모들의 이런 기대는 일본의 만주강점 이후 현실화되었다. 국제법상 명백한 불법행위이며 기존의 세계체제에 대한 도전이었던 일본의 군사행동에 대해 서구열강과 중국의 국민당 정권은 미온적으로 대응했다. 순식간에 일본이 자기 영토의 몇배가 되는 광활한 만주를 차지하였다는 사실은 ‘무적 황군’의 신화를 강고히 했을 뿐 아니라, 조국의 독립을 바라던 조선인들에게 깊은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아무도 제어하지 못하는 일본의 힘을 보면서 조선 내 많은 지식인들은 민족독립의 희망을 잃어갔고, 희망을 잃은 지식인들은 민족운동 선상에서 점차 탈락하면서 친일의 길에 발을 들여놓았다. 1930년대에 국내의 반일운동, 특히 민족주의자들의 운동이 쇠퇴한 것은 결코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희망이 민족독립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지만, 희망을 잃은 사람들이 독립을 위해 싸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 그곳은 ‘동양의 서부’






사진/박정희,정일권(사진)등 만주인맥을 통해 남한사회에 뿌리내렸다.(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정치적인 면에서 일제의 만주강점은 조선의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에게 좌절을 안겨주었지만, 경제적인 면에서 이들은 만주라는 광활한 시장을 확보한 일제가 차린 잔치판에서 배제되지 않았다. 일제의 만주강점은 ‘만주 붐’ 또는 ‘만주열’(滿洲熱)이라 불린 호황을 가져왔다. 실제로 일본은 1929년의 세계대공황의 충격에서 가장 먼저 벗어난 나라였고, 그 이유는 바로 만주의 점령으로 새로운 시장과 새로운 투자수요가 활짝 열렸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자본가 계급에게 이제 일제는 타도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모반을 꿈꾸기에는 너무나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일 뿐 아니라 새로운 이윤 추구의 기회를 제공한 은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1930년대의 만주는 ‘동양의 서부’였다. 미개척의 벌판, 당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땅, 만주. 1920년대까지 파산당한 우리 동포들이 마지 못해 짐을 싸 만주로 발걸음을 뗐다면, 1930년대 일본과 조선의 청년들 중에는 출세나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만주로 향한 사람들이 많았다. 교사라는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긴 칼 차고 싶어’ 만주 군관학교에 지원한 박정희도 그런 젊은이들 중 하나였다. 동양의 서부 만주에는 참으로 다양한 인간들이 뒤엉켜 살고 있었다. 인종적으로도 ‘오족협화’(五族協和)라는 구호에 잘 나타나듯이 중국인, 만주인, 몽고인, 일본인, 조선인 등이 뒤엉킨 만주는 세계 제패의 야망에 불타는 일본 군인과 관료에서부터 그들의 망상에 의해 모든 것을 빼앗기고 끝내는 죽음을 당하는 중국 농민들이 함께 살아야 했던 곳이었다. 200만 재만조선인들에게도 아편장수, 개장수에서 농민에 이르기까지, 천황폐하에 충성을 바치는 황군 장교에서부터 일제를 타도하려는 공산유격대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살길을 찾아 몸부림친 곳이 만주였다. 그 부글부글 끓던 만주에서 젊음을 보낸 식민지 출신의 두 청년은 20여년이 지난 뒤 남과 북의 최고통치자로서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대결하게 된다. 그리고 김일성과 박정희가 각각 너무나 다른 위치에서 보낸 만주에서의 젊은 시절 경험은 분단된 남과 북의 정치사회문화에 서로 다른 각도에서 엄청난 규정성을 발휘했다.


흔히 ‘유격대국가’라고 불리는 이북은 주체사상의 시원을 항일무장투쟁에서부터 찾고 있으며, 혁명전통을 주체사상과 더불어 이북사회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의 두축으로 삼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생산도, 학습도, 생활도 항일유격대 식으로!”라는 구호를 쉽게 들을 수 있는 이북에서 항일무장투쟁은 단지 지나간 역사의 영역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정치와 사회의 운영에서 규범적 역할을 하고 있다.


이북에 끼친 만주의 영향이 일제와 일제가 세운 괴뢰국가 만주국에 대한 저항 속에서 배태된 것이라면, 이남에 끼친 만주의 영향은 바로 만주국에서 박정희를 비롯한 만주인맥이 얻은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이남에서 만주인맥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곳은 역시 군부였다. 1950년대에 이미 봉천군관학교나 만주군관학교 츨신의 만주인맥은 군의 요직을 점령하여 한때는 육군참모총장(정일권), 1군사령관(백선엽), 2군사령관(강문봉)이 동시에 만주인맥으로 채워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만주국의 그림자가 이남사회에 짙게 드리운 것은 역시 5ㆍ16 군사쿠데타로 만주군관학교 출신의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난 뒤의 일이다.



박정희… 정일권, 만주인맥의 경험





사진/장발단속 등 70년대 낯익었던 규제분위기는 30년대 만주국의 사회분위기를 빼다박은 것이었다.(72 보도사진연감)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꾸밀 때 만주인맥, 특히 박정희의 동기생보다도 1년 선배인 만주군관학교 1기생들인 이주일, 김동하, 윤태일, 박임항, 방원철 등은 쿠데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또 박정희와 동갑이지만 군 경력은 훨씬 빨랐던 정일권은 박정희 아래에서 오랜 기간 국무총리를 지냈고, 만주국의 고위관료 연성기관인 대동학원 출신인 최규하는 박정희 정권의 마지막 국무총리로서 박정희가 죽은 뒤 감당할 수 없는 자리인 대통령을 잠시 지내다가 전두환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만주 출신들이 대통령이나 총리 같은 요직을 지냈다는 것만으로 이남사회에 드리운 만주국의 그림자를 설명하는 것은 너무 피상적인 일이다.


만주국은 흔히 괴뢰국가라고 불린다. 여기에 비해 대한민국은 분명히 독립국가이다. 그러나 독립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갖는 자율성은 항상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내면지도’(內面指導)라는 이름 아래 국정의 구석구석에 깊이 개입하며 좌지우지한 관동군 지배하의 만주국과,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내정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을 삼가고 있는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대한민국을 동일한 차원에서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미국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의존해온 대한민국의 역사는 분명 명실상부한 독립국의 역사는 아니었다. 5ㆍ16 군사쿠데타 이래 이남은 만주국과 마찬가지로 반공을 국가이념으로 삼았다. 만주국에 주둔한 관동군과 만주국군이 소련이라는 가상적을 항상 염두에 두고 움직였다면, 이남의 군부는 ‘북괴’라는 주적없이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한다.


1960년대의 경제개발계획도 실은 그 뿌리가 만주국 시절로 거슬러올라간다.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시이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등 일본의 이른바 개혁관료들은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자신들의 이상을 펼 수 없는 일본을 떠나 만주국 실업부에 자리를 잡고 경제개발계획을 강력히 추진했다. 만주국은 일본의 국가개조를 꿈꾸는 고급장교들과 개혁관료들의 실험실이 되었고, 이 실험실에서 입증된 경제개발계획은 일본에 남은 동료들에 의해 일본으로 수입되었다.


그러나 경제개발계획의 내용 면에서 볼 때, 군수산업에 역점을 둔 자급자족적 중화학공업화와 수출주도형 성장을 추구한 박정희 시대의 계획은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주장하는 조선에서 시행된 총독부의 경제개발정책이나 일본 본토에서의 경제개발계획보다는 만주국의 경제개발계획의 기본 방향을 따르고 있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개발계획은 일본과의 국교 수교를 통해 일본자본의 유입으로 추진되었는데, 일본쪽에서 1965년의 국교정상화를 적극 추진한 인물이 기시 전 총리였고, 또 당시 외상으로서 이 조약에 서명한 인물이 바로 시이나였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는 한국과 일본에 포진한 만주인맥의 협력과 상호 신뢰에 기반해서 추진된 것이다. 1961년 11월 최고회의의장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 박정희는 이케다 총리가 주최한 공식만찬에 특별한 손님을 초청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시절 교장이었던 나구모(南雲) 장군이었다. 만주군관학교 생도 시절의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돌아간 박정희는 나구모에게 큰 절을 올리고 술을 따랐다. 일본의 만주인맥에게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이자, 이남에 만주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게 됨을 고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미국의 영향과 일본의 훈육



국가가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규제하고 훈육하는 병영국가, 규제국가로서의 만주국의 분위기는 유신시대 박정희 치하의 이남사회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월요일에는 국민교육헌장의 낭독으로 시작되어 재건체조로 마무리되는 애국조회, 목요일에는 사열과 분열행진으로 이어지는 교련조회, 국기에 대한 맹세, 점심시간의 혼식검사, 학교와 거리에서의 장발단속, 학생과 공무원들을 아침일찍 동원하는 조기청소, 열손가락의 지문을 꽉꽉 눌러 찍는 주민등록증(만주국에서는 국민수장(國民手帳)) 제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충효이데올로기 등 우리에게 낯익은 70년대의 학교와 사회생활에서의 규제분위기는 40여년 전 만주국의 사회분위기를 빼다놓은 것이다.


필자를 포함하여 이 땅의 30대 중반부터 50대 초반까지는 박정희 시대의 제도교육과 병영 생활에 의해 훈육된 사람들이다. 80년대 후반 이후 우리 사회는 많이 민주화되었지만, 박정희와 그 후계자들을 반대해 싸워온 사람들 안에도 박정희 시대의 잔재는 의연히 남아 있다. 일본에서 재일동포에 대한 지문날인 강요를 욕하면서도 대부분의 인권운동가들까지 포함하여 우리는 지지난해의 주민등록증 갱신에서 별로 거리낌없이 열손가락 지문을 꽉 눌러 찍었다. 중·고등학교와 병영의 분위기는 70년대에 비해 얼마나 달라졌을까? 물론 해방 이후 우리 사회에 영향을 끼친 요인이 만주국의 영향만이라는 것은 아니다. 특히 미국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영향이 한국사회를 지배할 수 있는 구조, 큰형님 미국의 의사가 관철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고방식이 부모의 나라 일본의 훈육을 받는 만주국의 그림자라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한겨레21 제352호
2001.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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