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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간첩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 봐
  글쓴이 이은희 글쓴날 2003-07-24 03:02:37 조회 3948

간첩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 봐
[우리 안의 냉전잔재-3] 통제 일상화 가능케 한 '주민등록증'

주민등록번호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이제 주민등록증은 우리 생활
의 일부가 돼버렸다. 한국인은 누구나 출생신고와 동시에 주민등록번호를 부여받
고, 때가 되면 동사무소에 제 발로 찾아가 지문까지 찍어주며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는 것이 일상화 돼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같은 현상은 오직 냉전을 호흡하며 살아온 우리에게만 익
숙한 풍경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대한민국형 주민등록제도'는 냉
전시대 국민 통제와 감시의 사명을 부여받고 이 땅에 태어났다. 그리고 그것은
냉전을 자양분으로 지금까지 계속 확대·강화돼 왔다.


군사독재정부와 함께 탄생한 주민등록제도
현행 주민등록제도의 시작은 일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태평양 전쟁 당시인
1942년 일본은 인력과 전쟁물자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 강력한 식민지 통제 정책
인 '조선기류령'을 시행했다.

이에 앞서 일본은 만주 점령지역에서 항일 빨치산 독립투쟁을 무력화하기 위해
강력한 국민통제제도를 이미 실시하고 있었다. 그 수단이 바로 국민들을 인종별로
계층화한 '국민수장제도'였다. 이 제도는 주민등록제도와 지문날인의 시초가 되었
다.

그런데 일본의 식민지 통치 수단 중 하나이던 이 제도들은 식민지배가 끝나고 나
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만주에서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던 박정희가 5·16
쿠데타로 군사독재정권을 세운 후 국민통제의 수단으로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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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주민등록제도의 변천사
1931년 일본의 만주국 국민수장제도 시행
1942년 조선기류령 제정
1962년 기류법과 주민등록법 제정
1968년 1차 개정으로 주민등록증 도입/6자리 주민등록번호 부여
1970년 2차 개정으로 전 국민 지문날인제도 도입
1975년 3차 개정으로 13자리 주민등록번호 채택/주민등록증 의무발급
1977년 4차 개정으로 주민등록증 미발급시 처벌 규정 1980년 주민등록증 소지의무
조항 삽입/주민등록증 발급연령 만 17세로 하향
1997년 주민등록법에 지문날인 근거규정 삽입
1999년 전자주민카드제도 도입 계획무산/주민등록증록증에 지문수록 근거규정 삽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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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쿠데타가 발생한 바로 다음해인 1962년 1월,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박정희)
는 조선기류령을 모태로 한 '기류법'을 제정하였고 그 해 5월에는 기류법을 폐지하
고 모든 대한민국 국민에게 기본인적 사항과 주소, 본적을 등록하고 이동시 퇴거와
전입신고를 의무화한 주민등록법을 제정했다.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한국현대사)는 "전국 단위의 주민등록제도는 국가가 국민들
의 정보를 자세하게 파악한다는 점에서 그만큼 국민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며 "주민등록제도의 도입은 병영국가로 들어가는 상징적인
조치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50년대 많았던 병역기피자가 주민등록제도 실시 후인 70년대 초에는 거
의 없어졌다"며 "그만큼 주민등록제도는 국가동원체제와 통제에 핵심적이었다"고
덧붙였다.

반공태세 강화하려 주민등록증 도입, 주민등록 1번은 박정희
이후 주민등록법은 반공태세와 국가안보태세를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계속 확대·강
화 되는 방향으로 개정되었다.

무장공비침투사건으로 국가의 위기론이 대두되었던 1968년에는 더욱 강화된 주민등
록 제도가 만들어졌다. 주민등록법 1차 개정으로 주민등록증이 도입되었던 것이다.
당시 공화당은 야당의 반대를 뿌리치고 국가안보라는 이유를 앞세워 예비군 전력을
더욱 강화하는 향토예비군설치법 개정안과 함께 주민등록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1차 개정안의 시행으로 1968년 말까지 발급대상자 1500만여 명에게 각각 고유한 주
민등록번호가 적힌 주민등록증이 발급되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에게는
1101xx-100001, 그의 부인에게는 1101xx-200002가 주민등록번호로 부여되었다.

1970년 2차 개정 때는 주민등록증 발급을 아예 의무화했다. 개정 사유는 '치안상
필요한 특별한 경우에 주민등록증을 제시하도록 함으로써 간첩이나 불순분자를 용
이하게 식별, 색출하여 반공태세를 강화하기 위하여'였다. 또 이때부터 개정안에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지문날인제도도 시행된다.

신군부, 주민등록증 소지 의무화 시켜
2차 개정안으로 국가 신분증인 주민등록증과 국가에 등록된 지문으로 자신의 존재
를 증명하지 않으면 누구든지 간첩이나 불순분자로 낙인 찍히게 되는 사회적 조건
이 마련된 셈이다.

역시 '안보태세를 강화하고 총력전 태세의 기반을 확립하기 위해(개정이유)' 만
든 3차 개정안에 따라 17세 이상의 모든 주민이 의무적으로 주민등록증을 받게 되
었고, 1977년 4차 개정안에는 주민등록증을 받지 않은 사람에 대한 처벌규정이 마
련되었다.

신군부가 들어선 1980년 5차 개정 때에는 주민등록증을 받은 모든 국민에게 주민
등록증 소지 의무를 부과하기에 이른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불심검문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주민등록증을 신주단지처럼 주머니 속에 지니게 되었다.

주민등록제도의 역할은 감시와 통제의 일상화
한홍구 교수는 "주민등록제도는 국가통제제도에 기꺼이 편입되어가는 과정이자 반
공규율화 과정으로, 국가의 관리와 통제를 당연한 것으로 내면화 하게 하는 역할
을 했다"고 평가했다.

언제 어디서나 국가에 대해 자신의 존재가 문제없음을 증명해야 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감시와 통제는 일상적인 것이 되어갔다.

이 때문에 주민등록제도는 역사적으로 친미와 반공을 생존기반으로 삼은 군사독재
정권의 권위주의와 국가주의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국가보안법과 1961년 제정된
반공법으로 인해 일체의 저항 움직임이 용공으로 내몰리는 상황에서 주민등록제
도는 간첩을 색출하기보다 저항운동을 억압하는 데 더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대전대 권혁범 교수(정치외교)는 "주민등록 제도는 한국사회의 국가주의의 반영이
자 잔재"라며 "국가는 북한이라는 적이 없었더라도 주민등록제의 필요성을 강조했
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민등록제도가 국가의 안보가 아니라 정권의 안보를 위해
존재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권 교수는 "우리는 국가의 감시와 관리를 내면화한 채, 사생활 보호라는 헌법이
보장한 권리마저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있다"며 "주민등록제도는 근대적 의미의
시민사회형성에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2003/07/18 오후 4:33
ⓒ 2003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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