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새벽 형사들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지문날인을 위한
압수수색영장 유효기간이 어제까지인 줄 알고 방심했던 게
화근이었다. 오늘까지 유효하단다. 제기랄.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 문을 열었더니, 마루에 내 담당 조사관과
종로서 폭력3팀장이 기다리고 있다. 아뿔싸! 잽싸게 문을 닫고,
방안 가구들을 문 쪽에 가져다댔다. 전화 통화로 팀장과의 협상을
시도했다.
“오늘 유효기간 보내고, 집행지를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실로 해서
다시 한번 영장 신청해주시라니깐요. 그것도 싫으시면 지금 저랑
같이 인권위원회에 가서 집행하시는 건 어때요? ” 영장 집행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란다. 하긴 저 양반으로서는 그게 최선이겠지.
영장이 움직이는 것보다 인권위원회 직원들이 움직이는 게 더
타당하단다.
국가인권위원회 담당자에게 전화했다. 잠시 부재중이란다. 휴우,
뭐 하나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다. 경찰과 대치중인 상황을
전하고, 돌아오시는 즉시 연락해주실 것을 요청했다. 혹시 오늘 밤
12시까지 여기서 갇혀 있어야 되는 건가? 오늘 만나야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잠시 후 아버지가 문을 열라신다. 형사들을 집밖으로
내보내셨단다. 방문을 여니, 아버지가 형사들의 최후통첩을
전해주신다. “왠만하면 그 지문 좀 찍지 그러니? 다른 사람들 다
찍는데, 넌 왜 그래? 1시간 동안 시간을 준단다. 인권위원회
직원이 온다고 하면, 올 때까지 더 기다려주겠지만, 아니면, 이곳
경찰에게 지원요청을 하고, 사다리차를 동원해서라도
강제집행한다는구나..”
사실 국가인권위원회도 뾰족한 수가 없다는 건 나도 잘 안다.
판사가 발부한 영장을 집행하겠다는데, 인권위라고 해봤자 무슨
수가 있겠는가? 다만 내가 굳이 인권위 사무실에서 영장을
집행하라는 요청을 하는 건 설사 지문을 찍게 되더라도, 이 사건에
대해서, 인권위가 정확한 사실을 인지하고, 다시는 나 같은 인간이
나오지 않게 해주리라는 일말의 희망 때문이다.
화가 났다. 집에서 이러고 있는 것도 화가 나고, 내가 경찰과
대치중인 상황도 짜증났다. 일단 집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장에 적시된 집행 장소가 거주지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체포 영장이나 동행 영장이 없는 경찰로서는 내가 집
밖으로만 나가면 강제로 집으로 데려오거나, 압수수색영장을
집행할 방법이 없으리라는 생각이었다.
현관문 앞. 잠시 망설여졌다. 현관문을 열면 형사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든 형사들을 우격다짐으로 집에서 먼 곳으로
데리고 나간 후에, 영장에 적시된 집행지를 방패삼아 집행을
거부하자고 마음 속으로 작전을 짰다. 현관문을 열었다. 오호..
아무도 없다. 아파트 현관으로 내려왔다. 역시 없다. ㅋㅋㅋ 이
양반들 어딜 갔지? ㅋㅋㅋ
아마 아파트 앞 경찰 지구대(옛 파출소)에 간 모양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 바로 앞에는 경찰 지구대가 있는데, 그 지구대 입구에서
바라보면 내가 사는 아파트 건물의 오른쪽 측면이 바로 보인다.
우리 동 주민들은 대개 그쪽으로 드나들기 때문에, 지구대에
앉아서, 나를 감시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파트 왼쪽 측면 쪽으로 아파트 단지를 뺑 돌아 나왔다. 무사히
영장집행지역에서 벗어나 탈출에 성공했다. 탈출에 성공하고 나니,
인권위원회에서 전화가 왔다. 참 빨리도 전화해주신다. 탈출 성공
소식을 전했다. 인권위 담당자는 도피(?) 중의 안녕을 기원해준다.
참 눈물이 나게 고마울 지경이다.
집에 전화해서 자식의 무사 탈출 소식을 전했다. 한참 후 담당
형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전화했다. 안 받는다. 무척 화가
나신 모양이다.
법원은 필요한 때에는 증거물 또는 몰수할 것으로 사료하는 물건을
압수할 수 있다. (형사소송법 제106조) 그런데 지문에 날인에
필요한 내 손가락은 "물건"이 아니다. 당연히 법원의 압수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특히 인터넷 백과사전 중에 가장 권위있는 것
중에 하나인 네이버 백과사전은 인간의 신체가 "물건"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토 박아두고 있다. 형사소송법 제114조을
살펴보더라도, 인간의 신체는 수색할 대상에 포함될 지언정,
압수할 대상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나는 신체에 지문이 날인된 물건을 숨기고 있지 않다. 만약
영장집행관이 지문이 날인된 물건 등을 얻기 위하여, 나의 손가락
또는 지문을 압수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압수의 합법적인 대상
영역에서 벗어난다.
물론 “검증”을 전제로 발부된 압수수색영장도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불법이긴 마찬가지다. 법원은 사실을 발견함에 필요한
때만 검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형사소송법 139조) 검증은
나의 경우처럼 모든 피의자의 지문을 수집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제도가 아니다.
지문 날인은 검증 중에서도 신체검사에 속한다. 피고인 아닌 자의
신체검사는 증적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현저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 한하여 할 수 있다. (형사소송법 141조 2항) 나는 피고인이
아니라 피의자에 불과하다. 게다가 내 지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증적의 존재는 전혀 없다.
이래저래, 난 오늘 밤 12시까지 집에 들어가지 못할 처지에
직면했다. 12시가 지나면, 또다시 발부될 영장과 직면해야 한다.
그까짓 것 지문이 뭐라고. 단번에 찍어주지 못하는 나도 웃기는
놈이지만, 그것 받아보겠다고 종로에서 군포까지 뛰어다니는
형사들도 참 안됐다. 오늘 영장을 집행하시려던 형사님들, 오늘
사격하시는 날이라던데, 그건 좀 잘 맞추셨으면 좋겠다.
※ 위 글의 배경상황이 궁금하신 분은 아래의 링크를
눌러주십시오
http://finger.jinbo.net/maybbs/view.php?db=finger&code=board&n=10985&page=101
copyright 2005 똘레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