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1/28(수)

[중앙 포럼] '겁쟁이 소비자' 만드는 사회 

 
설날 차례상에 올릴 음식을 장만하면서 내내 찜찜했다. '딱 한
접시만'하고 속으로 되뇌면서 양을 조절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미국에서 광우병에 걸린 소가
발견됐다는데, 차례상에 산적을 올리지 않을 수 없어서였다.
제수용품을 준비한 시어머니는 "오래전에 사둔 한우 쇠고기"임을
은근히 내세웠지만 마뜩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니나 다를까,
차례상을 물릴 때까지 산적을 찾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나라 소는 광우병과 관계없는 안전지대에서 자랐음을 번연히
알면서도 내심 못 미더웠던 것은 수입육이 한우 고기로 둔갑하는
것을 예사로 보아왔던 지난 경험 때문이다. 서구지향으로 바뀐
식단 때문에 일본에 이어 미국 쇠고기 수입의 제2위국이 된
우리다. 게다가 이미 국내에 들어와 있는 수입육은 광우병 검사를
하지 않았다고 했겠다! 그러니 1백만분의 1의 희박한 확률일망정
어찌 자유롭게 젓가락질을 할 것인가.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격이었지만 도리가
없었다. 하기야 호시탐탐 소비자들의 주머니를 노리면서도
소비자들의 안전과 편익은 뒷전이기 일쑤인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겁쟁이가 되는 것 말고 달리 방법이 있으랴. 

카드빚으로 인한 신용불량자가 4백만명이 넘는다고 아우성을 치고,
신용카드 회사가 부도나면 연쇄파장이 일어난다고 온 나라가
전전긍긍하면서도 정작 착실한 소비자에게 안전을 보장하는
기본적인 시스템을 갖추는 데는 눈감는 것이 우리 사회다.

비밀번호 유출에 대한 의혹이 끊임없이 일고 있지만 내로라 하는
대형 백화점조차 직원들이 대금 결제시 소비자에게 구두로
신용카드 비밀번호를 묻는다. 은행창구는 '옆사람에게 비밀번호가
알려지지 않도록 조심하라'면서도 여러 사람 앞에서 지불 청구서에
비밀번호를 쓸 것을 강요한다. 겨우 H백화점.S은행 등 극히 일부가
비치된 기기에 소비자가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시스템을 최근
도입해 비밀번호의 유출을 막는 정도다. 

현금카드는 지갑 속에 든 시한폭탄이다. 분실하면 거금을 날릴
각오를 해야 한다. 근래 은행은 '고객 편의'를 내세우며 종래
70만원이던 1회 인출한도를 경쟁적으로 1백만원 이상으로 늘리고
있다. 그러나 안전장치 보완에는 관심이 없다. W은행이 은행에
개인지문을 등록해 놓은 뒤 현금자동입출금기에서 지문을 확인하고
현금을 인출하는 장치를 마련한 것이 고작이다. 지역마다 인출에
차등을 두고 있는 미국에서는 뉴욕의 번화가라도 한번에
5백달러(약 60만원)를 넘게 찾으려면 은행창구로 가서 본인임을
확인받아야 할 정도로 현금 취급이 까다로운데, 우리는 전국
어디에서든 하루에 7백만원까지 빼내면서도 '무장해제'다. 

이동통신업체들은 소비자 편익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한다.
011.016.019를 사용하며 소비자들이 길게는 5년간 알뜰살뜰
모아놓았던 각종 서비스 마일리지가 물거품이 되든 말든 그저 한
사람이라도 더 010 통합번호로 옮기게 하는 데에만 열을 쏟고
있다. 그뿐인가. 낡은 휴대전화의 기기를 새것으로 바꾸면 반드시
대리점을 통해서 번호를 옮기도록 하고 있다. 소비자들의
번거로움은 아랑곳없이 본인 확인으로 사용료를 확실히 챙기기
위해서다. 선진 외국 소비자들은 설명서를 보고 새 기기에 번호를
입력한다니 묘수가 없지도 않으련만 통신기기 첨단을 달리는
우리네는 감감소식인 이 현실. 그러니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발전하면 무엇하나. 소비자는 주눅들어 겁쟁이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을. 

홍은희 논설위원 


(중앙일보)